지난 3월 26일부터 4월 30일까지 홍대 앞 <스타일 큐브 잔다리>에서는 갤러리 개관 기념전으로 주명덕의 「도회풍경」전이 열렸다. 1966년 「섞여진 이름들」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가 아홉 번째로 여는 개인전이다.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인터뷰를 위해 일산에 자리잡은 그의 넓은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소문이 나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도회풍경」전은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전통적인 풍경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스타일과는 다른 낌이었습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도시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가요?
- 나에게 있어서 도시는 그리 새로운 게 아니야. 그동안 도시에 관한 작업을 많이 해왔지.
그는 서가에서 몇 권의 사진집을 꺼내 보인다. 서울시의 의뢰로 그가 기획한 「'95 / '96 서울, 기획관리, 도시형태와 경관」이라는 사진집이었다. 「1999-2000년」이라는 사진집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서 1994년에 한국일보사와「1999-2000년」이라는 사진집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서 1994년에 한국일보사와 서울시에서 기획, 제작한 사진집에도 그의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도시는 별로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주제였던 셈이다.
사진가 주명덕
- 나는 서울서 자라고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울과는 너무나 친숙하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차를 타고 다녔고, 중학교 때는 종로까지 가서 전차를 갈아타고 다녔어. 그 때는 서울에서도 겨울이 되면 장작 패러 다니던 시절이었거든. 전쟁 때 부산으로 잠깐 피난 갔던 시절만 빼면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내 머리와 가슴속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걸어갈 때의 도시의 느낌과 차를 타고 갈 때의 느낌, 건물 위에서 보는 느낌들이 다 달라.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신이 보는 도시야. 눈높이에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지.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지 않아?
사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고,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 대학교 다닐 때부터 사진과 산에 미쳤었지. 사진을 취미로 시작했었는데, ‘현대사진연구회’라는 사진서클에서 활동하고 외국의 사진집이나 잡지 같은 것을 보면서 공부를 했어. 그 당시 나는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촬영하고, 집에서 현상, 인화를 하면서 지냈지. ‘현대사진연구회’에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님의 미학강좌 같은 것도 듣고 하면서 말이야.
선생님께 영향을 많이 주었던 작가가 있었습니까?
- 초기의 매그넘 회원들, 유진 스미스나 윌리엄 클라인도 그렇고 「라이프」나 「루크」지의 사진들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 또 일본의 히로시 하마야의 영향도 많이 받았지. 그런데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데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어.
초기작품은 「홀트 씨 고아원」이나 「차이나타운」 같은 사회적인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업을 하셨는데,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작품들이었죠?
- 「홀트씨 고아원」전은 내가 아마추어로 활동한 지 3년 만에 했던 습작인데, 현역 작가인 나에게 아직도 38년 전의 얘기를 하라고 하면 뭐라고 할 말이 없네.
그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별로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966년도에 전시회를 거쳐 1969년에 출판된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사진집이 당시의 한국 사진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끼쳤는가를 기억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950년, 우리나라에서는 동족상잔의 6·25전란이 터졌다. 195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VIVO」, 「10인의 눈」 등에 참가한 일련의 청년작가들이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새로운 표현의 질을 획득해 나감으로써 60년대의 현대사진의 대전환이 예고되고 있던 때였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R. 프랭크, W. 클라인 등에 의해서 그때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적 혼란, 열악한 경제와 폐쇄적인 문화적 상황이 계속되었고, 「신선회」의 짧은 활동을 제외한다면, 한국 사진은 아직 아마추어리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그는 한국전쟁이 남긴 혼혈 고아들이라고 하는 문제를 정면에서 직시하고, 그것을 사실적인 시각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하여 하나의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사진은 단순한 사실 보도적인 기능이나 또는 아마추어의 탐미적인 영역을 탈피하고, 사진의 기록성을 이용해서 하나의 시대적인 문제의식으로 제시한 최초의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동아일보에 혼혈아의 교육문제라는 주제를 다룬 사설이 실릴 정도였다. 그는 그의 사진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그 예술성으로 따지면 조형예술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태를 사진작가로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그러나 어느 분야의 예술보다도 뛰어나야 될 것이며 뛰어날 수 있는 조건을 사진은 가졌다. 사실과 기록이라는 특성으로…. ”
그가 사진의 기록성을 통해서 눈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들을 사회에 반영시키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8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그는 월간 중앙에서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에 날개를 달았다. 「한국의 가족」 시리즈를 비롯해서 「한국의 이방」, 「은발의 한국인」, 「명시의 고향」, 「한국의 메타포」, 「국토서정기행」 시리즈 등 8∼10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포토에세이를 잇달아 발표한 것이다.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고, 사회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킬 사진은 편집회의에서 걸러지기도 했다.
- 「한국의 가족」은 인류학자인 마가렛 미드와 사진작가 켄 하이만의 「Family」라는 공동작업에서 영향을 받아 사회학자 이효제씨 와 함께 작업했지. 그것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는 과정의 가족을 기록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계층별로 분류해서 촬영한 것은 중앙정보부에서 제재를 가해 발표를 못했지.
그 당시 사진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사진은 발표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당시는 이른바 기관에 불려 다니는 일이 흔한 시대였다.
- 1973년에 중앙일보를 그만둔 후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유신시대라서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수용이 안됐어. 그래서 발표할 수 없는 사진은 찍으나마나 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게 됐지.
1989년에 서울미술관에서 「풍경」전을 여셨지요? 어둡고 무거운 톤이 무척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작품을 내놓게 되신 건가요?
- 나는 나이 어린 중학생 시절부터 등산을 했었어. 사진을 시작하고도 산행은 계속되었지.풍경 작업은 1981년 겨울, 내가 즐겨 찾던 설악산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됐어. 그 사진을 보고, 대상을 이렇게도 볼 수가 있구나 하고 계속 그쪽으로 작업했어.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현재와 같은 톤과 일관된 작품세계를 갖게 됐지. 이 작업을 하면서 이제 나는 그 누구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 자신으로서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30대 초반까지 나의 사진은 내가 속해있는 사회가 보다 밝은 곳이 되는데 기여하려고 노력했어. 그 후 40대까지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나의 조국이 갖고 있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전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순박한 마음을 내 사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대들에게 남겨보려는 작업을 했지. 그러나 이러한 작업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옛것에 대한 지나친 향수일 거야. 나의 풍경 사진들은 나의 감성세계를 표현한 거야. 거듭 말하지만 논리 정연하게 설명한다거나 미화시킬 수가 없어.
이 사진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내 사진에 매료되어 내가 느낀 것 그 이상으로 나의 사진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기를 바랄 뿐이지. 동산 스님은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堧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得意而忘言) 라고 했는데, 내 사진에 대한 견해도 이 말로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해.
* 그 풍경을 로우키로 인화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 가요?
- 그것은 암실에서 작업하다가 만들어낸 나만의 느낌이야.
* 최근 선생님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황규태 선생님의 개인전, 그리고 강운구 선생님의 신간 출간 등 비슷한 세대 작가들의 활동이 정말 활발한데요. 서로 경쟁관계에서 자극을 받는 것일까요? 세 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 우리들이 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뭐 모여서 서로 어떻게 작업을 한다느니… 뭐 그런 일은 없어. 각자 자기의 작업을 할 뿐이지. 우리는 음악을 정말 좋아해. 나는 주로 성악을 듣는데 강운구 씨는 바로크 이전의 고악(古樂)을 들어. 황규태씨는 현대음악을 듣지. 젊은 오빠야.
* 앞으로 다른 전시 계획이 있으신 가요?
- 내년에 경주에서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전람회를 열거야. 약 500점 정도를 거는 대형 전람회지. 이제까지의 작업을 물론 새로운 작업도 선보일 예정이야.
*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 드려요. 내년 경주에서 좋은 작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성곡미술관에서 발표한 그의 「도회풍경」 사진에 관해서는, 한 작가가 일관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젊은 사진가들의 의견들이 갈린 적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분명한 자신의 세계를 지켜 나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주 전시에 어떤 작품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한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