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통념은 자기 내면의 주관적인 표현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사진이라는 취미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사진이 주관적 매체인지, 통념처럼 한 장의 사진이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5. 사진에서 말하는 주관성
사진에서 말하는 주관성은 대체로 바라보기의 주관성, 즉 주관적인 시각 일 뿐이다.
오로지 모양새만을 염두에 둔 주관적인 사진도 사진을 그림처럼 생각하는 태도와 차이가 없고,
그 안에 의미가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6. 예술성에 대한 회의와 예술적 방법에 대한 고민
사진은 ‘빛의 낙인’이다.
예술과 비슷한 외양을 갖추었다 해도, 복제물이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7. 시각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의혹(그림같은 사진의 한계)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통해서 사진이 예술품이 될 수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사진을 예술을 위한 재료로서 바라보는 관점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8. 아마추어 사진가는 충분히 준비 되었을 때 갑자기 카메라를 놓는다.
이상적인 모양새를 추구하면서 그림같은 사진을 찍던 아마추어 사진가는 한계를 느끼게 되어있다.
그는 무의미에 시달린 나머지 사진이라는 취미를 포기하게 된다.
===================================== 1. 그림처럼 찍힌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일까? =======================================
온라인 사진동호회의 갤러리를 둘러보면 ‘그림 같은’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사진에 붙은 댓글에서 “수채화 같다”든지, “유화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 사진에 대한 찬사로 쓰이는 것을 보면,
아마추어 사진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디지털적인 수단으로 사진을 수정해서 그림처럼 만드는 수정 기법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 그 사진들에 식상한 나머지, 이런 현상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가져본 동호인들도 있지 싶다.
사진의 목표는 그림을 닮는 것일까?
그림처럼 찍힌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일까?
그림처럼 찍힌(혹은 만들어진) 사진도 사진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혹은 그런(즉, 다만 아름다운 그림일 뿐인) 사진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간혹 순진한 동호인이 게시판에 비슷한 질문을 던진 일도 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빤하다.
‘작가의 개인적인 주관이 중요하니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취지의 댓글에 의해 질문은 간단하게 묵살되고,
시류時流에 뒤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자가 되어 톡톡히 면박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왜 이런 질문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자기 ‘주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질문자가 궁금해 하는 것은 ‘사진이 주관적’이라는 일반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런 사진에 대한 당신들의 주관은 무엇인가?‘ 였을 텐데 말이다.
만일 ‘좋은 그림을 닮는 것이 곧 좋은 사진이 된다’ 거나
‘그렇지 않고, 사진이란 모름지기 어떠어떠해야만 한다’는 식의 자기 주관이 없다면,
대체 사진은 어떻게 진전시키고, 사진 활동은 어떤 방향으로 해 나갈 것인가?
‘개인의 주관이 중요하다’는 식의 댓글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사진에는 객관적인 기준은 물론 수준이나 우열도 없고, 옳고 그른 것은 더더욱 없다.
사진은 오로지 개인의 생각과 정신의 소산이고 표현물이니 타인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어쨌든 누군가의 사진은 좋은 평가를 받고 다른 누군가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만일 좋은 평가를 받는 사진이나 사진가가 있다면 그와 그의 사진들은 다른 사진들에 비해 어떤 점이 있기에 그러하며,
그렇지 못한 사진은 무슨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공모전은 또 무엇인가?
어떤 사진은 선정되고 다른 사진은 왜 뽑히지 않는 것일까?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은 우수작을 선정한데 대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주관적이고 사적私的인 관점이어서 말하기가 곤란한 것일까?
만일 ‘좋은 그림이 곧 좋은 사진’이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 된다면,
공모전에 응모할 의향이 있는 사진가들은 자기가 지향할 사진 활동의
방향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림처럼 찍힌(혹은 만들어진) 사진’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답변은
어떤 형태로든 사진을 평가하고 선정하는 과정에 반영되어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공모전 등에서 사진을 뽑을 때의 기준 뿐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바라볼 때 내리는 마음속의 평가에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작용하고,
또 내가 사진을 찍을 때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는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라는 명제 속에
함께 묻어버리기에는 약간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에 명확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진의 정체성에 대한 이 질문은
나를 포함한 많은 아마추어사진가들과 순수사진을 하는 사진작가들이 풀어내야 할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 2. ‘사진이 그림 같다’는 말에 숨겨진 의미 =====================================
‘사진이 그림 같다’ 라는 말은 정확하게 어떤 뜻일까?
그 말 속에 단지 ‘외관이 아름답다’ 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그가 ‘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묘사할 때,
자신이 의도하는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서 나머지 부분을 약화하거나 생략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화가가 의도한 것은 그의 사고思考를 통해 착안한 어떤 의미일 수도 있고,
다만 감각에 이끌려서 만들어 내는 미적美的인 모양새일 수도 있다.
그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형태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전부 세밀하게 묘사한다면,
그림에서 의도한 바를 표현하거나 외부에 전달할 방법이 없다.
명암이든 색채이든 윤곽선의 흐리고 선명한 정도이든 화가는 자기 그림에서 주제와 나머지 부분에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는 통일성(짜임새라고 생각하면 된다)과 단순화의 원리를 통해 강조되어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떤가?
사진도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그림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진가가 프레임과 앵글을 선택할 때 주안점을 두는 것은
명암과 형태의 적절한 배치와 앵글이 만들어내는 선의 흐름 같은 것들이다.
산만하고 어수선한 부분은 프레임에서 배제하거나 약화시키고,
주제(대게는 그냥 주된 피사체일 뿐이다)를 강화하기 위해
명암의 차이나 광학적 원리에 근거한 원근법과 심도를 이용한다.
수단에 차이가 있고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그림과 사진은 별 차이점이 없다.
둘 다 ‘2차원의 평면상에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유사성은 더 커 보인다.
그림과 사진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사진(혹은 그림)이 그 안에 담긴 대상과의 사이에 얼마나 강한 유대紐帶를 맺고 있는가?” 이다.
‘사진은 사진 자체와 사진 속에 담긴 장면(그 현실)간에 서로 어떤 유대관계에 있는가?’
‘그림은 그림 자체와 그림 속에 담긴 장면(그것이 있는 경우라면 그 현실)사이에 서로 얼마만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가?’
곤충학자가 사진기를 매고 멸종 위기에 있는 곤충을 조사하고 있다.
그때 그가 찍은 사진은 사진 속의 대상 즉 ‘멸종 위기에 있는 곤충’과 밀접한 유대관계에 있다.
그는 어떤 지역에서 그 곤충을 발견했는데,
역광에서 실루엣이 되도록 찍었다면, 사진을 제대로 찍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곤충학자가 촬영한 곤충사진은 그 곤충이나 주변의 서식환경 등 '사진 속 현실'과 밀접한 유대관계에 있다.
‘가치나 의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림(혹은 사진)은 ‘그 안에 담긴 대상‘에 따라서 그 가치나 의미가 얼마나 좌우되는가?
“누구, 무엇 혹은 어떤 장면을 찍었는가?
“ 하는 것이 사진(혹은 그림)의 가치를 좌우하는 면이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아내인 [리자]라는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모나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부인을 그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가?
그림을 두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거의 농담이나 넌-센스에 가깝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림은 그림 속의 현실, 즉 모델이 누구인지, 무엇을 그렸는지,
그림 속의 장소가 어디인지에 의해서 의미나 가치가 좌우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진도 그럴까?
사진은 누구, 무엇 혹은 어떤 장면을 포착한 사진인가? 에 따라서 의미나 가치가 좌우되는가?
예의 곤충학자가 (멸종위기에 있는 곤충이 아닌)다른 곤충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찍었다고 한 들
그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증명사진이나 보도사진 혹은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사진 속 대상이 사진기를 겨누어야 할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다른 형태의 사진들은 어떨까?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사진은 사진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에 따라 전적으로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지만,
다른 사진은 별로 그렇지 않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진이 사진 속의 대상과 상당한 유대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인물이나 멋진 포즈를 포착하면 아름다운 인물사진이 되고,
환상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빛이 비치는 광경을 포착하면 좋은 풍경사진이 되며,
사라지거나 희귀하거나 진기한 장면이 담긴 사진은 아무래도 좋은 사진으로 인정받는다.
비단 그것이 누구인가? 무엇인가? 혹은 언제, 어떤 장면인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은 사진이 포착한 현실의 모습에 근거해서 존재하며,
시간과 세상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의미와 가치를 띄게 된다는 점은 모든 사진에 적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 본성상 사진은 동어반복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사진 속에서 하나의 파이프는 언제나 파이프이고 이것은 요지부동이다.
사진은 언제나 그것의 지시대상을 함께 실어 나르는 것 같은데, 그것들은 사진과 서로 꼭 붙어있다. 』
- 밝은 방. 롤랑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 심상을 그려낼 수 있지만,
사진은 가시적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찍어낼 수 없고,
많든 적든 찍혀진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연출이나 구성사진을 포함한 모든 사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연출된 장면이나 구성된 사물조차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에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된 사진의 ‘사진 속 현실’은 연출된 장면이고 사진은 그 연출된 장면의 영향을 받는다.
연출된 사진에 감탄하는 관람객은 연출이 뛰어난지 사진이 뛰어난 것인지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즉 사진이 사진 속에 담긴 대상과 무관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이 연출한 장면을 자기가 촬영한 경우에도 사진이 그럴듯하게 찍혀 나오면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남이 그려둔 벽화나 그림을 사진 찍어서 나타난 아름다운 이미지에도 마냥 감탄하고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혹은 훌륭한 것은) 사진가 자신과는 대체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모든 것을 불문하고 사진이 아름다우면 된다’는 식의
형식주의적인 경향은 사진에 대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태도이다.
무엇을 찍었든 어떤 방법을 썼건 간에 사진이 이미지로서 뛰어나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진기를 도구로 해서 그림을 그리려는 태도’와 같다.
그러므로 ‘사진이 그림 같다’는 말 속에는 바로 이런 태도로 사진을 찍는다는 뜻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상적인 이미지를 담기 위해서 사진이 사진 속에 담긴 대상과의 유대관계를 떠났거나 혹은 매우 느슨해진 것’이다.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듯이 사진을 찍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방법은 연출이다
우아하게 생긴 여성을 골라서 화장을 하고 조명으로 명암을 적절히 조절하고
포즈를 취한 다음 품격 있는 의자에 앉았다면
그렇게 연출된 장면 자체가 이미 잘 그려진 인물화와 같다.
어두운 배경 속에 강하면서도 은은한 빛이 비쳐드는 얼굴의 선과 뺨에 감도는 분홍빛 피부색은
[렘브란트]의 그림 못지않게 아름답다.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 표정에는 신비한 느낌이 흐르고,
멍한 눈망울은 어찌 보면 절망에 빠진 사람 같아서 연민의 감정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바로 그 완성된 그림을 찍은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아름다운 대상이나 그런 장면만을 골라서 찍는 것이다.
사진가는 사진 찍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대상과 장면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촬영 포인트를 찾아 나서고,
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계절과 날씨와 시간대를 선택한다.
빛이 좋은 시각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각視覺을 자극하는 대상을 찾아 나선다.
배경이 단순하고 명암의 구성이 조화롭게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찾는다.
좋은 조건을 갖춘 상황과 좋은 대상을 잘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은 곧 사진을 잘 찍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사진을 찍는 기교와 관련된 것이다.
이 방법은 다른 수단들에 비하면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데 가장 미미한 영향을 준다.
사진으로 찍어야 할 눈앞의 현실이
시각적 아름다움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 사진가들은 어떻게 하는가?
즉, 사물들이 짜임새 없이 산만하게 늘어져 있다든지,
명암이 어둠과 밝음을 제대로 갖추고 적절히 분포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사진가는 그 장면을 그대로 사진 찍으면 형편없는 사진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앵글을 이리저리 옮겨서 사물들의 배치 상태가 좋게 보이도록 조절할 것이다.
또 광학적 원리를 활용해서 부분적으로 배경을 흐리게 만들거나,
명암의 차이를 이용해서 일부분을 감추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좁혀서
대상의 일부만 포착하는 방법으로 기어코 사진을 그림처럼 찍어낸다.
장 노출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과 패닝이나 주밍 같은 기교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 방법도 여의치 않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은 물론 찍어 온 사진을 가공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림같은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보정 수준의 간단한 처리에서부터 이미지를 왜곡하고 합성해서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재창조하는 것까지 방법과 깊이가 무궁무진하다.
위 네 가지 방법은 사진가가 사진을 찍을 때 사용하는 수단을 빠짐없이 열거한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내가 깜박하고 빠뜨린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 바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진을 그림처럼 찍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렇게 하는 사진가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사진이 그림으로 될 때 사라지는 것은 사진이 원래 지니고 있던 (사진 속 피사체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진실성을 기반으로 증명과 증거가 되고,
사진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에 대한 상징과 기록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띈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찍은 사진과 백두산 천지 사진에 인물을 합성한 사진은 차이가 있다.
사진을 가공해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면 사진이 원래 지닌 '내용'은 완전히 사라진다.
아름다운 것만 골라 찍는 태도는
'내용'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사진적인 기교가 지나치면 '내용'이 담겨진 사진 속 현실이 훼손될 수 있다.
연출한 사진의 '내용'은 곧 연출의 의도 속에 들어 있다.
연출한 사람의 머릿속에 오로지 사진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의도 뿐이었다면,
아름다운 것만 골라서 찍거나 가공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아마추어 사진가가 만일 기록의 속성인
‘사진 속 현실을 자기 사진의 내용으로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어야만 한다.
연출을 했든, 사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기교를 부렸든
또는 아름다운 대상이나 장면만을 선택해서 찍었든, 찍은 사진을 가공하는 방법을 이용했던 간에
‘내용이 없는’ 사진은 모두 그림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그저 아무 이유도 없이 만들어져서 인터넷 망을 떠돌아다니는 유령 같은 이미지일 뿐이다.
============= 3. 사진의 의미 =============
예술가의 내면세계와 의도를 기준으로 볼 때,
같은 예술적 장치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술가에 가까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광고제작자의 광고는 광고주의 내면을 연구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흠을 감추고 좋은 점을 과장해서 상품을 파는 것이다.
삽화가는 뉴스기자나 타블로이드 판 잡지의 사진가 중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를 찾아낼 것이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얼마만큼 고용주의 눈에 그럴듯하게 실제처럼 보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
유행을 따르는 초상화가는 예의를 차려 아첨하는 이들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다.
그의 위선은 물질적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장식가와 스타일리스트는 물론이고
소파위에 걸어둘 그림을 구상하는 사람이
케이크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서 노력하는 제빵사와 같은 의도를 가지는 한
그들의 기능이란, 감각의 즐거움을 이용해 호사품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 예술가의 리얼리티. 마크 로스크 -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그것을 하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
‘목적과 이유’는 그 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지침’과 ‘의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지침’에 따라서 처리한 일의 결과물에 만든 사람의 ‘의도’가 녹아드는 것이 곧 ‘표현’이다.
광고사진의 목적은 상품의 흠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해서 사람들이 많이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의도는 광고주의 요구를 경청하고 그의 내면을 살펴보는 방법으로 알 수 있다.
상업사진의 목적은 고객을 만족스럽게 해서 돈을 받자는 것이다.
그 의도는 고객의 내면을 살펴보는 방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저널리즘 사진의 목적은 기사의 내용에 부합하는 장면을 찍는 것이다.
그 의도는 기사 내용을 가늠하고, 데스크의 의중을 살펴보는 방법으로 알 수 있다.
만일 이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을 찍었더라도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될수가 없다.
그런데 ‘그림 같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왜 그런 사진을 찍고 싶어 하며,
그가 무엇인가 찾아 나서고 앵글과 프레임을 조절하고
노출을 맞추는데 영향을 주는 구체적인 ‘지침’이란 어떤 것일까?
이제 이쯤에서 한 가지 자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지금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형편없이 폄하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비난받을 일에 대비해서 미리 방패막이를 해 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백하건데 나도 역시 ‘그림처럼 사진을 찍는’ 경향이 매우 강하고
나의 그런 행위의 타당성을 설명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로 이글을 쓰는 것뿐이다.
나는 이제 "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의도가(위에 인용한 글에 있듯이)
‘감각의 즐거움을 이용해 호사품을 만드는'
제빵사나 플로리스트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 고 말 해야 할 것 같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말이다.
“그렇지 그게 문제야!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아”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취향이 다르거나 좋아하는 스타일과 감각적인 면에서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즉, 미적美的인 형식)은
‘예쁘고 선정적인 것’에서부터 ‘우아하고 세련되고 기발한 것’까지
형식에서 우러나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
어떤 이미지가 만들어졌든 간에 그것을 만든 사람의 내면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좋지 않은 또 한 가지 현상은 그들이 프로사진가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바로 광고사진이나 웨딩사진의 냄새가 나는 상업사진 풍의 사진들이다.
나는 그것이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서 스스로 만족하고
남들 앞에 과시하고 싶어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의도는 가볍지만 순수한 면이 있다.
가볍게 시작한 아마추어 사진가의 의도는 시간이 흐르고 연륜이 늘면서
깊이가 생기고 예술가의 그것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프로사진가의 의도는 처음부터 매우 얄팍하면서도 순수하지 못하다.
뿐 아니라 그 의도는 사진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 일을 맡긴 사람의 의도이다.
광고사진가의 의도는 장사꾼의 그것이고, 상업사진가의 의도는 고객의 의도이다.
물론 장사꾼에게도 장사꾼의 철학이 있고, 그곳에도 심오한 철학적 깊이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장사꾼의 철학이 순수 철학에 비해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인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고용주나 고객의 철학과 의도를 읽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사진 속에 사진에 대한 사진가 자신의 철학이나 미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프로사진가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그들의 흉내를 내는 데 그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프로가 될 목적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의도가 분명치 않은 막연한 연출 기술과 장비와 조명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을 얻는 정도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엇을 창안하거나 독창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의 것을 모사하는 ‘연습용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 4. 그런데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사진을 왜 그런 식으로 찍게 되었을까? ===============================================================
정확하고 탁월한 묘사력은 사진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사진은 눈앞의 세상을 어떤 솜씨 좋은 화가의 그림보다도 더 정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 묘사 능력 때문에 사진은 증명과 증거자료로 인정받고
회화와 동일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모양새 보다 ‘사진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가 중요하고,
사진의 가치와 의미는 전적으로 그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사진의 기록적인 가치와 의미를 경시하고
단지 이상적이 이미지를 만드는 데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사진을 기록의 도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문화적 문제나 역사적 관점에서 세상을 기록하고
사건.사고를 수집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사진기를 들었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 있고 개개인의 관심사가 있기 마련인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사진의 근원적인 속성에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가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바깥세상 보다는 자기 내면과 정서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고
사진에서 객관성보다는 주관적인 표현을 기대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하필 자기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인
글쓰기나 그림그리기를 선택하지 않고 자기 기질이나 목적에 잘 맞지 않는 사진을 택했던 것일까?
나는 그 혐의를 ‘오늘날 사진이 예술로 불리고 있다’는 점과 ‘사진의 주관성에 대한 오해’에 두고 싶다.
예술은 자기 내면의 정서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고,
많은 사람들이 사진이 (품위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사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힘든 연습과 타고난 소질이 필요하고,
문학은 지난한 학습과 어렵고 고통스러운 사고思考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예술이지만, 사진은 그저 손가락만 까딱하면 그럴듯한 작품이 만들어 지니 얼마나 접근하기 쉬운가?
다만 돈이 좀 필요하고, 부지런함 이라는 자질을 요구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진이 통념처럼
‘주관적 표현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술인지’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주관성을 부정하거나 예술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성이나 예술성이 사진에서는 통념상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뒤에 따로 언급하겠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사진의 기록적인 가치와 의미를 경시하고
단지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만 치중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아주 간단한 원리 때문이다.
기록을 원하는 사진가들조차도 사진을 찍을 때 흔히 같은(그림처럼 찍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진가는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게 되는 것일까?
왜 프레임을 자꾸 좁혀가고, 심도를 이용해서 배경을 흐리고,
명암의 차를 이용해서 디테일을 사라지게 만들거나, 안개로 인해 흐려진 풍경을 선호하는가?
그렇게 할수록 사진 속의 대상이 지닌 원래의 의미와 가치는 흐려지는 이미지와 함께 점점 약화되고 사라져 가는데도 말이다.
사진 속의 현실이 지닌 의미와 미적 조건 사이에는 서로 배반적인 측면이 있다.
어느 한 쪽을 강화하면 다른 한쪽은 약화되거나 사라지기 쉽다.
프레임을 넓게 하면 많은 정보를 기록할 수 있지만, 조형성을 갖추기는 어렵다.
명암의 차이 등을 이용해서 화면을 단순화하면 구성을 아름답게 만들 수는 있지만 좋은 기록이 되기는 어렵다.
희귀한 야생화는 늘 빛이 잘 드는 곳에만 피어있는 것이 아니고 의미 있는 유적지의 경관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사회적 관심사가 되어 사진 찍힐 이유가 있는 인물이라고 해서 모두 우아하거나 근엄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좋은 빛이 드는 창가에 놓인 화원의 야생화는 희귀하지 않고, 아름다운 비경은 역사적 유적이 아니어서 의미가 없다.
따라서 희귀한 야생화를 포착하려면 좋은 빛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며,
의미 있는 유적지를 사진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사진이 아름답게 찍히지 않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아름답거나 신비로운 느낌의 인물사진을 찍으려면
사진 찍힐 이유가 있는 인물 보다는 그런 조건과 이미지를 가진 사람을 찍어야 한다.
물론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출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할 뿐 완전하지는 않다.
이 점은 좋은 피사체를 찾아 헤매면서
사진을 잘 찍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경험 많은 사진가라면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물이나 장면이 동시에 아름다움의 조건까지 완전하게 갖추었다면,
사진가는 갈등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눈앞에 제시되는 현실은 늘 사진 찍기에 좋은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진가는 찍고 싶은 대상이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때까지 반복해서 찾아가고 기다릴 수는 있다.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꾸미기 위해서 빛을 비추거나 약간의 연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가능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둘 다 얻는 것이 불가능할 때,
사진가는 결국 대상이 지닌 가치와 사진의 모양새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통상 의미 있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아름다운 모양새를 지니기 어렵고,
모양새가 좋은 사진은 대상이 본래 지닌 (좋은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사진 속에 그대로 담아내기 어렵다.
이것은 무엇보다 사진은 만들어내는 방법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을 가시권可視圈 내에서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좋은 기록을 위해서 아름다운 모양새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것은 사진도 그림과 같이 사각의 평면 안에 2차원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관람객 앞에 그런 모습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미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사진이 형편없는 이미지로 보여 지는 꼴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미적 감수성이 뛰어날수록 그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다.
두 가지 이유 즉 ‘사진에서 주관성과 예술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사진기를 들었다’는 점,
그리고 ‘신뢰할만한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미적인 외관을 갖추려는 욕구 사이에는 서로 배반 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사진을 그림처럼 찍게 된 원인을 제공한다.
======================== 5. 사진에서 말하는 주관성 ========================
[피카소]와 추상미술이 꽃피던 1950년대에 유럽에서는 소위 [주관적 사진]이 활성화되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오토 슈타이네르트]는 자신의 주장. 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사진적 객관성의 한계는 피사체를 자르고 격리시키는 화면 틀의 설정,
인간의 시각과는 다른 사진의 원근법, 육안과는 반대로 아주 좁은 폭의 회색조만 가려내는
사진 영상적 색조의 중화상태, 움직이는 현실을 고정시키는 순간성이다. ’
위의 글을 요즘 식으로 쉽게 고쳐서 읽어보면,
‘사진적 특성들 즉, 프레임의 선택, 인간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는 원근법, 제한적인 관용도,
움직이는 순간포착 능력 등으로 볼 때, 사진이 마냥 객관적인 매체라고만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을 들어 사진의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확실히 사진은 인간의 육안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찍히고,
사진가는 대상을 선택하고 프레임을 잘라내고 사진기를
조작하는 방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자기 기질과 관심사를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명백히 복제 장치인 사진기를
복사기나 X-RAY촬영기와 같이 그저 단순한 복제 장치라고 만 말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또한 그 복제 장치를 이용한 출력물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주관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진사寫眞史를 읽다보면, 객관적 대상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주관적인 관점을 강조한 사진가들의 논리는 모순을 담고 있거나,
대체로 허풍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내 사진을 보는 사람은 내 생각을 보는 것‘이라는 [듀안 마이클]의 말이나,
‘모든 것은 정신 속에 있다’는 [마이너 화이트]의 말 같은 것들이다.
다음은 [워커 에반스]가 [브레송]을 반박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 사진 속에는 신비한 앙금 같은 것이 가라앉아있고,
그것은 또 작가가 선택하는 ‘결정적 순간’과 같은 무의미한 공식으로 충족될 수는 없다.
사진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정의인 “어떤 사실의 의미 그리고 형태들의 엄격한 구성에 대한 인식‘은
가장 허술한 의미망으로 짜여있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사실‘은 더 이상 의미를 일으키지 않으며 더욱이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즉 ‘사진 속 현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띄더라도,
어떤 사진가에게 그것은 그가 원하는 의미가 아니다.
[워커 에반스]는 사진 속의 피사체가 지닌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자기사진의 의미로 한다는 것은 곧 ‘무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은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의 기록성을 경시하는 요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그는 자기 사진의 의미를 위해서
‘현실이 주는 의미’ 대신 ‘신비한 앙금’을 집어 들었지만,
그가 말하는 ‘신비의 앙금’ 같은 것이 만약
피사체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인상에 불과하거나,
사진가와 무관하게 사진기가 현실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생긴 기계적 특성이나 우연성의 결과물이라면,
그는 여전히 사진 속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으로 무의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현실이 주는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거부하는 사진가들도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의 제약에 어느 정도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상의 자유로운 흐름을 제한 당하는 사진가들은 거기서 뛰쳐나오고 싶어 했다.
주관적 사진을 원했던 사진가들은 대게 사물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진의 주관성은 오로지 ‘바라보기’의 주관성이 될 수밖에 없다.
주관主觀이란 ‘자기대로의 생각이나 관점(국어사전)’을 말한다.
사진은 주관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사진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사물을 표현할 수는 없다.
자기 주관을 가지고 바라볼 수는 있으되 주관에 따라
무엇을 창조하거나 변형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관적’이라는 말의 통념 때문에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사진도 그림처럼 자기 생각대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런 점을 강조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주관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인해 자기표현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속의 주관이
사진기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너무나 쉽게 벗어난다는 것을 알아채고 실망한 나머지,
사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만들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요즘은 물론 여기까지는 거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는 [디지털 파인아트]를
‘사진’ 속에 포함시킬지는 아직까지 논의된 바 없다.
그렇게 되면 사진가는 사진기를 놓고 재빨리 CG전문가로 변신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6. 예술성에 대한 회의와 예술적 방법에 대한 고민 ============================================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진은 예술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듯이 보이지만,
지금도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사진에서 예술로 봐줄만한 면모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최근 5년 동안 사진에 대한 비평 담론의 양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사진의 지위가 좀 더 분명하고
좀 더 탄탄한 방식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무엇이 사진의 질을 구성하는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며 어떤 사진이 형편없고 나쁜 사진인가?
사진의 질은 사진매체의 특성을 숙지하는 것과 비례하는가?
아니면 사진 찍히는 대상의 속성들에서 비롯되는가?
만약 인화지, 인화재료, 렌즈 그리고 빛에 전적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현실과 거래를 트는 방식에 달려있다면 사진 매체의 근본 토대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현실의 현존 때문에,
본디 사진은 애매모호하고 그 본질을 논의한다는 것이 도로徒勞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서 사진 작업과정의 반자동성,
다시 말해 선택과 구성의 모든 가능성 너머에 있는 사진이미지의 기록은
사진가의 조절능력을 벗어난다는 사실과 그 결과 사진가는 결국 거르고 선택하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사진.인덱스.현대미술( 2003년 초판 발행), 로잘린드 클라우스 -
사진은 처음에 기록을 위한 도구로 출발해서 지금은 예술의 지위에 올랐다.
사진의 역사는 마치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리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사진가들의 처절한 투쟁사처럼 보인다.
회화의 목표가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였던 시절에 사진은 그림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화주의 사진(1860~1900년)과 영상파(1890~1910년) 사진가들은
사진이 기록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그림이 되는 방법을 통해서 독자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진이 나오면서 회화는 복제를 통한 기록과 증명의 임무를 사진에게 넘겨주고 재빠르게 변신해 나갔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로는 기껏해야 진부한 그림(지금은 진부해진 사실적인 그림)을 모방할 수 있을 뿐이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기법을 발전시킬수록
사진에서 멀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진가들은 사진 만이 할 수 있는 '사진적 방법'을 발전시킨다.
현대에 와서 사진은 다양한 ‘주관적인 시각’을 선보이고, 초현실주의를 닮는 등 예술 비슷한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의 냄새를 풍길지언정, 사진이 사진 속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사진가의 의도가 매체의 한계 안에 묶여있는 한,
한 장의 사진이 예술작품으로 변모하는 일은 매우 난감해 보인다.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논지를 담은 많은 주장들을 여기에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 주장들의 요지는 모두 ‘사진이 복제장치인 사진기를 사용해서 만들어진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 원칙적으로 그림은 비교적 분명한 회화적 메시지를 그 형태 안에서 이미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다 올바른 작가의 예술적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소위 비평이라는 형식으로 텍스트의 설명이나 해설이 작품에 첨부된다.
그래서 비평은 작가의 최초의도 그것으로부터 조형적으로 번역된 작품을 연결하는 일종의 해석학적 가교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진이미지를 조직하는 최소단위는 광자(光子)세포이다.
왜냐하면 사진을 이루는 세포들은 언제나 빛에 의해 동시에 발생하고 동시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은 그 진행과정에서 동시에 그리고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빛의 낙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수많은 광자들이
물리-화학 혹은 물리-디지털 혹은 물리-주사 방식으로
순간적으로 사진적 사건이 되고 이때 만들어진 사실주의는 사진적 사실주의이다.
그런데 광자적 세포에 의해 동시에 구성되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 또는 번역을 그림의 경우처럼 직접 드러내지 못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의 절대유사 만을 가지기 때문에
사진은 근본적으로 번역적 혹은 해석학적 재현이 아닌,
언제나 무엇을 감추는 함축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
- 이경률,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 -
한마디로 ‘사진은 ‘빛의 낙인’ 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작가의 의도를 담아 낼 수 없다‘는 요지이다.
화가는 사물을 바라볼 때, 머릿속에 자기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림은 그가 바라본 사물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화된 이미지이다.
그러나 사진가는 사물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인상印象들을 주시하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인상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그 사물이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인상들 중 선택된 어느 하나의 '낙인'이다.
예술에 관한 많은 정의 중에 현대에 와서 가장 무난하고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수잔 k 랭거]의 다음과 같은 정의인 것 같다.
"예술은 인간의 감정을 상징하는 형식의 창조이다."
사진이 인간의 감정을 상징하는 물질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사진가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창조된 형식인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보도사진과 같이
기록과 증명으로서의 사진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문화적인 관심거리를 사진 찍어서 “이것 좀 보세요, 이런 것도 있군요”
하고 직접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단순한 행위에서 재미를 느끼기에는
내 머리통이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모양인지 나는 그런 것에 도무지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다른 아마추어 사진가들처럼 나 역시 ‘감각적 자극’ 때문에 사진에 끌렸고,
지금도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미는 단지 곁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은 ‘감각적 자극의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감각적 자극’은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고 감정의 동요는 우리를 여러 가지 재미와 생각의 깨달음으로 이끈다.
머리에서 시작되어 지식과 논리적 사고를 통해 생겨나는 흥미나 깨달음과는 작용하는 방향이 다른 셈이다.
“예술품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감각적 자극의 덩어리이다.“
이 생각이 너무 선정적이고 직설적이어서 통용되는 예술의 정의가 비록 그렇지 않을지라도,
나는 어쨌든, 최소한 예술품을 이루는 주요 분자는 ‘감각적 자극’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진은 음악이나 그림처럼 그 자체로서 풍부한
‘감각적 자극’을 품기에는 대체로 미흡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진이 내 눈에는 생기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떤 존재감을 보이는 것들에서 조차
그 대부분이 내 안에서 야기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말하자면 예의상의 관심일 뿐이다.
그것들에는 아무런 ‘푼크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지만 나를 찌르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오직 ‘스투디움’ 만이 부여된다.
스투디움은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다양한 관념, 일관성 없는 취미의 매우 방대한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쪽의 욕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광경들, 옷들, 책들에 대해 느끼는 동일한 종류의 막연하고 잔잔하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그 우연이다. 』
- 밝은 방. 롤랑바르트 -
이 글은 ‘사진에 대해 관객들은 ’미적지근한‘ 느낌 밖에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매우 복잡하게 늘어놓은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품이라면 미친 듯이 반하게 만들고, 사람을 깜짝 놀라도록 하거나, 정신없이 집착하게 하고,
멍하게 생각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데,
사진에서는 좀처럼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간혹 발견되는 그런 요소는 단지 ‘우연’에 의해 나타날 뿐이라는 말을 끄트머리에 덧붙여 두었다.
원숙한 사진가가 자기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음악의 본질은 소리, 즉 청각적 자극이다.
그림의 본질은 이미지, 즉 시각적 자극이다.
그러면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타났다가 매 순간 변하고 사라지는 현실일까? 아니면
그림과 마찬가지로 시각적 자극일까?
음악이나 그림은 소리나 시각적 자극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다.
사진도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 7. 시각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의혹(그림같은 사진의 한계) ======================================================
사진기가 연필이라면 그 연필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미술연필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엉뚱한 문에 대고 열심히 노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화가는 인식認識과 사고를 통해서 시각적 자극(그림)을 만들어 낸다.
인식과 사고의 과정이 없으면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종이에 그려내는 과정은 그저 시각적 자극이 손으로 전달되는 것만은 아니다.
눈을 통과한 시각적 자극은 뇌의 인식과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해석되면서 색과 모양이 되고 선으로 되어 붓끝에 전달된다.
그림을 그려 본 경험이 있는가?
그림에서 흔히 사물과 사물 간의 경계는 선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사물과 사물 사이의 접점을 선으로 표현하면 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로 사물과 사물 사이의 접점이 선일까?
물리적으로 따진다면, 풍경 속에 있는 먼 산의 능선이,
배경과 인물 사이의 경계가 선 일리는 없다.
그것은 색이나 밝기가 부드럽게 변화하는 면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명도를 지닌 작은 원들이 길게 늘어진 집합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필 그것을 간단하게 선으로 그었다면,
그는 머릿속으로 한 동안 고민을 했고 또 전에 비슷한 광경이 그려진 그림을 많이 보아 왔다는 뜻이 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선으로 그어질 때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조차도 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풍경 앞에 서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어느 부분을 선으로 그어야 할지 몰라서 종이에 연필을 갖다 대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보고 그것을 모사하는 것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발상이나 창조성의 유무와는 다른 문제이다.
이미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것을 모사할 때는 해석의 과정이 필요치 않다.
모사한 그림은 진품에 비해 외형이 덜 아름답다거나,
원작자가 그리지 않았다는 상징적인 문제 때문에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난이도가 낮다거나, 물리적으로 쉬운 과제인 때문도 아니다.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릴 때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상에 선과 면과 명암과 색채 등으로 번역해야만 한다.
그것은 선이 아닌 것을 선으로, 면이 아닌 것을 면으로,
그리고 물감이 아닌 것을 물감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오랜 경험과 자각과 반복되는 숙련의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차이는 책을 쓰는 것과 책을 필사하는 것 간의 차이와 유사하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성분들은 그림을 이루는 성분들과 전혀 다르다.
세상이 그림 속에 들어앉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 뿐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전혀 다른 물질이 창조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화가는 그림, 즉 아름다운 감각적 자극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그 감각적 자극의 덩어리는 그것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의미가 각인되어 있다.
사진이 찍히는 방식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매우 다르다.
그는 건너편에 보이는 산의 능선을 선으로 그어야 할지,
숲은 어떤 물감을 섞어서 칠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진가는 자연 현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감각적 자극을 지각知覺할 뿐,
직접 자극을 해석하기 위한 인식과 사고의 과정이 필요치 않다.
사진가가 앵글과 구도를 정하고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은
눈앞의 시각적 자극을 필름에 재현하기 위해 해석하는 과정이 아니다.
감각적 자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복제하기 위해서 기계를 작동시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진에서 형식주의에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고 의미를 인정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림은 ‘해석’인데 비해 사진은 ‘복제물‘이다.
나는 사진을 시각예술로 분류한 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그렇게(시각예술인 것으로) 생각하고 또 기대하며, 거기에 매달리고 있지만,
사진이 회화와 같이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방식을 통해서 예술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복사기나 X-RAY 장치와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진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복제를 위한 도구이다.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사진기의 복제물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어 왔지만,
사진에 대한 그런 입장은 무의미와 무력감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끝도 없는 심연을 향해 용감하게(혹은 미련하게) 나아가는 것과 같았다.
사진은 주어진 외부상황에 매우 의존적이며 사진기의 기능으로 제한되는 사진가의 표현은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모든 논의의 대상은 다큐멘터리나 영화와 같은 일련의 사진이나,
사진을 재료로 해서 재구성된 회화 형식의 사진들이 아니라
그림처럼 액자에 넣어져서 갤러리에 걸리는 사진들이다.
사진 공모전에 뽑히는 사진이나 온라인 갤러리에 올리는 사진도
그렇듯이 한 장의 사진에서 예술적인 면모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사진이 제대로 예술의 면모를 갖추려면,
사진을 재료로 해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든지 아니면 개념주의적인 태도로 완전히 돌아서서
기발하고 창의적인 작가의 정신세계를 펼치는 방법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 같다.
“ 그림은 그렇지 않은데 왜 사진만 유독 그래야 하는가! ” 라고?
위에 인용한 [이경률]의 글에서 말했듯이 ‘현실의 자국’인 사진에는 사진가의 ‘의도’가 들어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함축적 재현’이란 ‘인간의 의도를 통해서 해석되지 않은 현실의 낙인‘이다.
작가의 의도로 걸러지지 않은 빛의 낙인은 관객들에게는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고,
사진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사진에는 작가도 없고 주인도 없다.
한 장의 사진은 예술의 재료나 만들어진 예술을 전달하기 위한 매체가 될 수 있을지언정 예술 그 자체로 보기는 어렵다.
============================================================== 8. 아마추어 사진가는 충분히 준비 되었을 때 갑자기 카메라를 놓는다. ==============================================================
아마추어 사진가 행세를 해온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사진동무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밤길을 마다 않고 장거리 원정을 다니거나,
욕먹을 일도 마다하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면서 사진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이들이었다.
취미로 사진을 시작한 사진가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과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사진에 대한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
무의미에 시달리고, 매체를 의도대로 통제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에 무너지고,
피사체를 찾아서 끝도 없이 헤매다가 지친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진에서 쉽게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일정한 장비가 마련되고,
원하는 사진을 찍는데 기술적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어느 정도 원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즈음이 아닐까 싶다.
문득 사진 찍기가 시들하다는 생각이 들더니, 그냥 사진기를 놓게 된다.
열정과 즐거움은 창작행위의 동력動力이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진흙으로 개나 고양이를 만들 때의 즐거움은 재료를 주물러서 자기 손으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다.
어휘를 나열해서 의미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글쓰기나, 음(音)을 배열해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이루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통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그런 능력을 지닌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그 즐거움은 열정에 불을 붙이고,
끓어오르는 열정은 마침내 예술가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엄청난 결과를 만들도록 이끄는 동력이 된다.
사진을 찍는 초창기에는 셔터를 눌러서 만들어진 정교한 이미지에 놀라고 만족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진흙을 주물러서 동물의 형태를 만든 어린아이가 느끼는 즐거움처럼,
내 손으로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만들어냈다는 '창조적 통제행위'에서 오는 즐거움과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즐거움은 상당부분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비와 사진에 익숙해지고 점차 내가 생각하는
'의도'나 '발상' 같은 것을 반영해서 '나 다운'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되면서,
사진기의 다이얼을 돌리고 셔터를 누르는 방법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사진을 잘 찍기 위한 조건은 사물을 보는
시선이나 카메라를 조작하는 솜씨에 있기보다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외부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카메라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이미지를 전적으로
'내가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동안에는 사진찍기에 대해 강한 열정을 느낀다.
그러다가 사진 이미지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수록 사진찍기에 대한 열정은 식어간다.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고 강할수록, 개입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좌절감은 더 커지고
사진찍기는 점차 맥이 빠지는 우울한 작업이 된다.
우울증의 정체는 물론 매체와 외부환경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데서 비롯되는
'무력감'과 '내 사진이 텅 비어 있다'는 데서 오는 허무감이다.
잔뜩 쌓인 사진장비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란 마치 ‘사랑이 사라진 뒤에 남는 의무감’과 같다.
취미란 자기만족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의미를 찾아내고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그 일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이제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기술을 익혔고
사진적인 시각도 갖추었다면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만 하는게 아닐까?
대상에 매료되어 셔터 누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사진이 예술이라고 믿는다면 그에 걸맞은 의미도 찾아내야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가 그렇듯이,
예술가의 의도는 우주와 존재,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과 ‘본질’에 닿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예술은 철학이나 과학처럼 논리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머리 아픈 방식이이기 보다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유쾌한 놀이를 통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사진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행해온 예술적인 방법들 중에서
아직까지 구미가 당기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형식적이면서도 그리 대수롭지 않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지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끌리지 않았다.
사진기를 단순히 수집과 기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처음부터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으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기록을 위한 매체라는 사진의 본성을 받아들이면서
감각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원한다는 것은
한꺼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좇는 일처럼 고되고 한계가 뚜렷했다.
사진이기를 포기하고 아예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핸디캡을 갖고 시작하는 불공평한 게임 같아서 자신이 없었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부담스럽다면 그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열정에 들뜬 취미 활동의 결실은 ‘그림같은 사진’이 가득 쌓인 ‘내사진 폴더’ 이다.
그 사진들은 나와 내 이웃의 행적을 기록하지도 않았고,
내 (정신적 혹은 예술적)성장을 반추하지도 않는다.
세상과 사진을 바라 보는 시각이 발달하고 생각이 깊어져도 사진은 언제까지나 깊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나를 놀라게 했던 아름다운 한 장의 사진은 이튿날은 진부해 보인다.
문득 ‘감각은 자극과 같아서 감각이 세련되고 발전해 갈수록
끝도 없이 새롭고 강렬한 그것을 요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족감이 흐릿하게 희석되면서 ‘건너편 언덕에 닿지 않는 다리 위에서 서성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의미로 이어질 수 없는 사진활동은 '그늘에 심어진 묘목과 같아서 꽃은 피지 않고 언제까지나 잎만 무성하다,’
그러나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정답을 찾아낸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어쨌든 삶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럴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 어떤 것에 기대어 살아가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며, 알고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런 오류를 모두 바로잡고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배제한다 해도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볍고 얄팍하거나 곧 잘못된 생각인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무엇이든 자기 사진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 글의 요지를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끝맺는다.
『 가공적으로 제작되는 사진은 작가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은 이런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보여주려는 원칙에 설 때 만 가능하다.
그의 기법 자체가 그의 실험의 대상인 만큼 그는 최대한 명증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인위적인 것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렇게 모든 사진의 객관성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심일 뿐이다.
왜냐하면 각 작가의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진의 사실성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