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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琴詩(금시) - 소식(蘇軾)
    사람,사랑, 그리고 시 2011. 2. 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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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 - 단원도(거문고 연주) (1784)




    琴詩(금시) 
                                 소식(蘇軾)
    若言琴上有琴聲(약언금상유금성) 만약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면
    放在匣中何不鳴(방제갑중하불명) 상자 안에 두었을 때는 어째서 울리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약언성제지두상) 거문고 소리가 손가락에서 난다면
    何不于君指上聽(하불우군지상청) 어찌 그대 손가락에서는 들리지 않는가?
    
      요점 정리 지은이 : 소식(蘇軾 : 東坡) 시대 : 중국 북송시대 갈래 : 칠언절구 성격 : 선 문답 시 이해와 감상 오늘은 조금 철학적인 詩 한 수를 감상하기로 하자. 요즈음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뭔가 잘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調和(조화)되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詩文뿐 아니라 書(서), 畵(화)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던 蘇東坡(소동파)는 佛敎(불교)의 禪宗(선종)에까지 이른 깊은 철학적 思惟(사유)를 노래하기도 했다. 손가락과 거문고의 관계는 무엇일까? 蘇東坡(소동파)가 거문고를 타며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생각했던 禪 問答(선 문답) 같은 詩 한 편을 읽으며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자. [소동파] 심화 자료 蘇軾[소식 : 蘇東坡(소동파)]1036. 12. 19 - 1101. 7. 28.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자는 자첨(子瞻). 동파(東坡)는 그의 호(號)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 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 (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 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山東省]에 있음)· 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東坡 :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號)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로 생을 마감했다.

      거문고 독주 - 무영탑 2악장

    출처 : 내 인생의 바다
    글쓴이 : 내 인생의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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